Page 140 - 고경 - 2024년 1월호 Vol.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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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玄悟 화상이 서원西院의 전각들과 만경루를 중수하였다. 1760년에 대화
          재로 대웅전과 만경루萬景樓를 위시한 수백여 칸의 당우들이 모두 화마에
          사라지고 약사전과 관음전만 겨우 살아남고 불상만 건졌을 정도였다. 이

          듬해 원담圓潭 화상 등이 형편대로 재원을 마련하여 중건을 하니, 대웅전,

          극락전, 나한전, 시왕전, 고루鼓樓가 있는 진여문眞如門, 비전碑殿, 판전板
          殿, 약사전, 관음전으로 도량이 이루어졌다. 1678년에 조성되어 백련사에
          모셔졌던 아미타삼존불은 현재 목포의 달성사에 옮겨져 있다.

           그 옛날에는 백련사에 속한 암자들이 많았는데, 이 당시에는 1745년 북

          쪽 기슭에 탄징坦澄화상이 세운 수도암修道菴과 그 아래 1752년에 세심洗心
          화상이 세운 세심암洗心菴만 남아 있었다. 판전에는 세조 때에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인출한 완질본과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 화상

          이 송나라에서 교장敎藏을 구해와 간행한 원각판을 여기서 중각重刻한 경

          판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만덕사지』에 의하면, ‘대웅보전大雄寶殿’, ‘진여문眞如門’, ‘만경루萬景樓’,
          ‘명부전冥府殿’, ‘향로전香爐殿’, ‘세심암洗心菴’, ‘수도암修道菴’의 현액은 원

          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 선생의 글씨라고 했다.

           원교 선생은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백부가 처벌될 때 연좌
          되어 부녕富寧과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어 25년간 유배생활 끝에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부인은 선생이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진自
          盡하였다. 그의 나이 16살 때인 1721년에 그는 예조판서이던 부친이 노론

          4대신을 탄핵한 일로 유배되어 사망하는 일을 겼었다. 원교 선생의 큰 아
          들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지은 이긍익李肯翊(1736~1806) 선생이고, 둘
          째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 선생의 양명

          학陽明學을 이은 신재信齋 이영익李令翊(1740~?)이다. 아버지와 아들들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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