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고경 - 2024년 1월호 Vol.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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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萬德寺蓮經法席疏」가 남아 있다. 그는 시도 잘 지었으니, 다산 선생은 신라
             와 고려에 글로 뛰어난 사람을 꼽으라면 최치원과 천책화상, 이규보가 으
             뜸이라고 평하였다. 『동문선』에는 천책화상이 지은 글이 많이 실려 있다.

               이렇게 백련사는 요세화상의 백련결사운동으로 조계산의 지눌화상의

             수선결사운동과 함께 고려후기 불교계를 주도하는 주요사찰이 되었다. 결
             사운동이 확산되어 가던 이 시기는 강화도 천도시기 불교는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였는데, 천태종과 조계종의 이런 결사운동은 그 당시의 상

             황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원간섭기인 1284년(충렬왕 10) 개경에 충선왕忠宣王(재위 1298~1308)
             과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원찰로 묘련사妙蓮寺가 창건
             되었고, 백련사 출신의 승려들이 이곳으로 진출하면서 백련사의 사세는 퇴

             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개경에서 활동한 원혜대사와 정오대사는 국

             사나 왕사로 책봉되었다. 이렇게 백련사는 절정의 시기에서 하산의 길로 접
             어들었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들의 침략으로 절이 소실되었고,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황폐해져 간 것으로 보인다.




                백련사를 중건한 영수 행호화상과 효령대군


               조선시대 초기에 주요 사찰을 거의 장악하며 교세를 확장해 가던 천태

             종의 영수 행호行乎(?~?)화상이 이 절에 들렀다가 황폐함에 놀라 중건하기

             를 발원하고 1430년(세종 12)에 제자들과 일을 시작하여 1436년에 불사를
             마쳤다. 그 규모와 양식으로 볼 때 옛 모습을 다 회복했을 정도였다. 행호
             화상은 태종과 그의 아들인 효령대군, 성녕대군誠寧大君(1405~1418) 그리고

             세종과 그의 아들 안평대군 등과 친밀하게 지냈다. 특히 효령대군은 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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