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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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통해 각 종파의 승려들을 선발하였고, 또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을
             전국 사찰의 주지에 임명하였다.
               승려들에게는 평상시 백성의 의무라고 할 수 있는 군역과 납세의 의무

             가 면제되었으며, 부분적으로 결혼도 허용되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출가

             하여 승려 되려는 자가 너무 많아 국가에서는 아들이 4명이 되어야만 그
             중에 1명을 출가시킬 수 있도록 하는 출가 제한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승려 수와 관련하여 중국의 『송사宋史』 「고려전高麗傳」에 “남녀

             210만 명으로 병사, 백성, 승려가 각각 3분의 1씩이다.”라고 기록되어 있

             다. 즉 천민을 제외한 백성 210만 명 가운데 1/3이라면 대략 70만 명 정도
             가 승려라는 이야기다. 『고려사절요』 범례에도 “반승飯僧한 수가 10만 명에
             이르러 거금을 허비한 경우는 반드시 기록하였다.”라고 하여, 승려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학을

             숭상한 조선에서는 승려의 수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태조로부터 성종 대까지
             기록에서 승려 수에 대한 언급이 확인되고, 그 이후는 승려 수에 대한 내

             용이 보이지 않다가 18세기 영조 대에 다시 나타난다. 아마도 연산군 대부

             터 사실상 국가의 불교 기구와 승과가 폐지되고 도첩度牒을 발급한 승려에
             게만 군역을 면제해 주는 혜택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승려 수에 대한 국가
             적 논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우선 『태

             조실록』의 기록을 보자.



                  대사헌 박경 등이 상서하기를, “… 나라의 출가자는 원래 정한 수
                  가 없고 백성 중에 승려가 10분의 3은 되는데, 그 가운데 부역할 수

                  있는 자가 3분의 2는 될 것입니다.”     - 『태조실록』 4년, 1395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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