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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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고 출가자의 수는 그리 줄어들지 않았다.


                                        도승지 현석규가 말하기를, “무릇

                                        백성으로  군졸들은  옷과  양식을

                                        준비하느라 그 고통이 너무 심하
                                        여 처자도 보육하지 못합니다. 그
                                        런데 승도는 따뜻하게 입고 배불

                                        리 먹으며 처를 두고 자식을 키우

                                        며 어떠한 국역도 없이 제멋대로
                                        합니다. 그래서 세금에서 도망하
                                        고 역을 피하려는 자는 모두 그리

                                        로 돌아갑니다. 병사의 수가 날로
          사진 2.  성종 7년 6월 5일의 실록 기록.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줄어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정

              해년에는 호패법을 행하여 담당 관리가 백성의 군정軍丁을 단속
              하였는데 그때 승려 된 자들이 모두 14만 3천 명이었으며, 깊은

              산에 숨어서 찾지 못한 자가 또한 그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정

              해년부터 지금까지 10년이고 그 사이에 승려 된 자가 또 50~60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이 때문에 병사의 수가 늘지를 않습
              니다. 지금 산사山寺마다 거주하는 승려가 적어도 10여 명을 밑돌

              지 아니합니다.”

                                              - 『성종실록』 7년, 1476년 6월 5일.


           성종 대까지 대처승을 가려내어 군역을 부과하도록 하는 정책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던 것 같다. 여전히 군역과 납세를 면제받는 승려 가운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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