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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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다. 오늘날 학계에서 ‘억불’ 혹은 ‘배불’이라 부르는 이러한 정책은 태종
             대부터 본격화된다. 태종은 사찰 노비의 대부분을 국가에 귀속시켰으며,
             국가가 인정하는 종파를 11개에서 7개로 통합하고, 재정 지원 사찰 수를

             242개 사찰로 대폭 축소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7개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재편하고 선종 18개 사찰
             1,850명과 교종 18개 사찰 1,800명, 즉 36개 사찰 3,650명의 승려에 대해
             서만 국가에서 경제적으로 지원을 하고, 그 외 사찰은 자체적으로 운영하

             도록 하였다. 물론 이 외의 사찰에 소속된 승려라고 하더라도 도첩을 받은

             승려들은 군역이나 납세를 면제받았다. 다만 도첩을 지급할 때 결혼한 승
             려를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을 더 이상 승가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
             였다. 그럼에도 면역승의 수가 줄어들지 않았던 것 같다.




                  임금이 도승지 이계전 등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 어리석은 백성
                  들이 (선왕께서) 부처를 좋아하셨다고 제멋대로 여겨서, 삭발하여 승
                  려 되려는 자가 거의 천백에 이르니, 금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제부터 기한을 엄하게 정하여, 기한 안에 보고하고 출가하는 자에

                  게는 정전丁錢을 받고서 도첩을 주고, 기한 안에 보고하지 않고 사
                  사로이 삭발하는 자는 법에 따라 단속하라.”

                                                  - 『문종실록』 1년, 1451년 4월 15일.



               국가에서 출가를 단속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 출
             가하는 것이 아니라 군역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출가하려는 자를 가려
             내기 위해서였다. 출가자가 많아질수록 일반 백성의 군역에 대한 부담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었다. 면역승을 줄이고자 하는 국가의 노력에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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