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9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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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승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해년(1467)에 있었던 호구조사에서 14만 3천
             명의 승려가 확인되었는데, 10년이 지난 1476년의 보고에서는 산사마다
             10여 명의 승려가 있고, 그래서 전국적으로 승려 수가 50~6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숫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장된 수치라고

             무시해야 할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장령 구치곤이 아뢰기를, “… 지난 정해년 호패를 줄 때 승도가 30

                  여만 명이었습니다. 이로 보아 지금은 거의 40여만 명일 것입니

                  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많음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구치곤이 말하기를, “금천현으로 말하자면 정병이 불과 5,
                  6명이나 사사寺社는 한두 곳이 아니고, 절마다 승도가 10여 명을 밑

                  돌지 않습니다. 그래서 40여만 명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

                  였다.                                        - 『성종실록』 10년, 1479년 11월 29일.


               구치곤의 보고에서는 정해년(1467) 호패를 줄 때 승려 수를 30여 만 명이

             라고 하였고, 1479년에 40여 만 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앞에서 언급한 현석규의 보고와 비교해 보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긴 하
             지만 승려 수를 40만 명 이상으로 보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로
             부터 1년 후에 정극인이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린다.




                  정극인이 대궐에 나아와 상서하기를, “… 선교양종에 소속된 사
                  사寺社를 헤아려 보면, 전라도가 2천, 경상도가 3천, 충청도가 1천
                  5백, 강원도와 황해도가 합하여 1천, 영안도와 평안도가 합하여 1

                  천, 경기·경산이 1천이니, 대개 1만을 밑돌지 않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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