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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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수는 10만 5, 6천을 밑돌지 않습니다. … 원컨대 도첩이 없는
자를 크게 색출하여 모두 환속시켜서 군액에 충당하소서.”
- 『성종실록』 11년, 1480년 10월 26일.
정극인은 전국의 사찰 수가 1만 여 곳이고 승려 수가 10만 5천 명 정도
라고 하였다. 이는 정해년의 호구조사에서 승려 수가 14만 3천 명이라고
했던 수보다 줄어들기는 했지만 매우 신빙성이 있는 숫자라고 여겨진다.
이 숫자는 태조 대에 백성의 1/3이 승려라고 했던 것에 비해 크게 줄어들
었는데, 지속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승려에게만 도첩을 발급했던 효과가 나
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도한 승역으로 줄어든 승려
이러한 승려 수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1592년 임진
왜란이 발발했을 때 의승군 수가 4~5천 명이었을 것으로 추산되므로 16
세기 후반 승려 수는 아무리 적게 추산해도 4~5만 명을 밑돌지 않았을 것
이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송시열(1607~1689)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 다
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승도들이 신역身役을 피하고 놀면서 백성의 양식을 축내어 국가의
해가 되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몇 해 전 어떤
선비가 총섭摠攝인 각성에게 승려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대략 17만 명이라고 했다 합니다. - 『송자대전』 권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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