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6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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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 등이 백성의 3/10이 승
                                              려라고 한 말은 앞에서 언급한
                                              『송사』의 기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때는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다소 과장은 있었겠지만 현실
                                              그대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

                                              다고  생각된다.  당시  천민을

                                              제외한 인구를 정확히 산출하
                                              기는 어렵겠지만 대략 300만
                                              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90만

          사진 1.  유처승 관련 고려사 기록. 사진 서울대학교 규    명 정도가 승려라는 계산이 나
              장각한국학연구원.
                                              온다.
           물론 이때 승려라는 신분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다를 수 있
          다. 『고려사』에 결혼한 승려를 의미하는 ‘유처승有妻僧’이라는 표현이 나오

          고 『조선왕조실록』에 대처승對妻僧(혹은 帶妻僧)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

          오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당시 유학자들이 말한 ‘승僧’이란 결혼하지 않
          은 비구·비구니를 비롯하여 결혼한 재가 신자인 우바새·우바이를 포함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첩을 통한 환속 정책


           조선의 권력자들은 결혼한 재가 신자인 우바새·우바이를 승가僧伽의

          범주에서 분리시켜 군역과 납세의 의무를 지우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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