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1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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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남한산성 남문. 사진 문화재청.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했으며 병자호란 때 3천 여 명의 의승군을 이
             끌고 임금을 구출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임금의 항복 소식을 듣
             고 진군을 멈추었던 벽암각성(1575~1660)이 당시 승려 수는 17만 명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이전보다 승려 수가 늘어난 것이

             아닌가? 이는 『영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부호군 이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역을 가볍게 하려

                  고 삭발하여 승려가 됩니다. 영남의 경우 큰 사찰이 3백 여 곳이며

                  절마다 각기 승려가 4, 5백 명이 됩니다.”
                                                  - 『영조실록』 13년, 1737년 9월 11일.



               이목의 상소대로 영남의 300개 사찰에 승려 400명을 합해 보면, 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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