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고경 - 2024년 7월호 Vol.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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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따라 설행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왕실의 상례에서도 확인된다. 1365년(공민왕 10) 공
             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나옹혜근이 국행수륙재를 주관하고 설

             법한 내용이 「국행수륙재기시육도보설國行水陸齋起始六道普說」에 실려 있는

             데, 이것이 칠칠재로서 수륙재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사』에 따
             르면, 수륙재가 7일마다 열려 매번 승려들이 범패를 부르고 채색 비단이
             사찰을 뒤덮으며 꽹과리와 북소리가 울렸다고 하였다.




                고려 왕시의 원혼을 달래는 조선 초기의 수륙재


               조선시대 수륙재는 고려 말 수륙재를 계승하였으며 크게 두 가지 형태

             로 행해졌다. 하나는 머물 곳 없는 외로운 영혼인 무주고혼無住孤魂의 명복

             을 기원하기 위한 천도재로서 행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손들이 망
             자亡者를 위해 설행하는 칠칠재·백일재·소상재·대상재 등의 천도재로
             서 행해진 것이다.

               먼저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는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 아들

             들을 비롯한 왕씨들을 천도하기 위해 처음 개설되었다. 태조는 재위 3년
             (1394)에 삼척, 강화도, 거제에 나뉘어 수용되어 있던 왕씨와 여러 곳에 흩
             어져 있던 왕씨의 자손들을 수색하여 처형하고, 그 이듬해인 태조 4년

             (1395) 2월에 삼척 삼화사, 개경 관음굴, 그리고 거창 견암사에서 국행수륙

             재를 설행하였고, 매년 봄가을로 왕씨들을 위한 수륙재를 지내도록 하였
             다. 이에 대해 권근은 「수륙의문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하께서) 금으로 『법화경』 세 부를 필사하시고 특별히 내전에서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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