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고경 - 2024년 7월호 Vol.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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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기존의 사십구재가 수륙재로 정착되어 연산군대 인수대비의 상례까
             지 이어졌다. 조선 건국 후 첫 국상은 태조의 정비인 신덕왕후의 상이었다.
             당시는 아직 국상에 대한 예제가 정비되기 전이므로 고려의 전례에 따라

             불교적으로 상례가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태조가 승하하자 『주자가례』에 의하여 상례를 치르도록 공표하
             였지만 실제로는 사십구재·백일재·법석法席과 재齋를 함께 설행하였다.
             또한 정종의 원비 정안왕후와 정종의 사십구재에서도 법석과 재를 함께 설

             행하였다. 승하 후 5일간 법석을 벌이고 7일이 되는 날 초재를 지내며, 회

             향 후 다시 5일간 법석을 벌이고 두 번째 7일이 되는 날 2재를 지내는 방
             식으로 일곱 번의 7재를 치렀던 것이다. 이때 49일간 지속된 법석과 재에
             는 많은 비용이 들었고 매우 번거로웠기 때문에 국상의 간소화에 대한 요

             구가 제기되었던 것 같다. 결국 세종 2년(1420) 태종비 원경왕후의 국상부

             터는 법석을 폐지하고 7일째의 재만 설행하였는데, 그 재의 형식이 수륙재
             였다. 원경왕후의 상례에 대해 예조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시행하는 칠칠재는 다 수륙재

                  와 같이 법으로 정하였으니, 돌아가신 선왕과 선후의 기신재도 역
                  시 산수가 정결한 곳에서 수륙재로 하는 법을 거행케 하도록 하소

                  서.” 하였다. - 『세종실록』 2년, 1420년 10월 1일.



               원경왕후 국상 이후 왕실 상제례는 ‘법석을 배제한 수륙재’로 간략하게
             거행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연산군대 성종 모후 인수
             대비 상례까지는 대체로 준수되었다. 실제로 세종은 “칠칠재와 선왕의 기

             일재에는 간략하게 수륙재를 베풀어서 전례를 폐하지 않을 뿐”이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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