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4년 7월호 Vol.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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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리고 성종 국상의 초재일의 실록 기록에는 “이날 승지 송질을 보
내어 장의사에서 수륙재를 설행하였다.”라고 하여 ‘초재’라 기록하지 않고
‘수륙재’라고만 기록하였다. 즉 칠칠재·백일재·소상재·대상재 등에서
법석 등의 큰 행사는 생략되고 수륙재만 설행됨으로써 상제례가 간소화되
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형태의 수륙재 중에서 왕실 의례에서 먼저 폐
지된 것은 첫 번째의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였다.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
재는 유교 제례인 여제厲祭와 비슷한 의식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여제는
비명非命에 죽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인 여귀厲鬼를 위해 거행하는 제
사이므로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와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태
종도 “수륙재는 여제와 비슷하니, 추천追薦은 수륙재에 합하여 설행하라.”
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한 시점에 조정 대신들은 불교 의식인 수륙재의 폐
지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세종 14년(1432) 집현전 부제학 설순 등이 수륙
사진 3. 진관사 수륙재.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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