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4 - 고경 - 2024년 8월호 Vol.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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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일체의 번뇌를 단멸
하여 여래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고, 깨달음을 체험한 뒤
에 남은 번뇌를 제거해 가며 깨달음을 공고히 하게 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
다. 직전의 체험을 잘 지키고 키워갈 것인지, 그것을 아낌없이 버릴 것인
지에 따라 입장이 갈리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번뇌가 남아 있다면 진
정한 깨달음이 아니므로 그 체험에 머물지 말고 남김없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서유기』는 양자의 입장을 겸한다. 매번의 고난을 해결한 뒤, 이를
발판으로 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건너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작은 깨달
음을 쌓아 큰 깨달음을 성취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돈오
점수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요마를 물리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요컨대
기왕의 성취를 버리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모든 요마
는 직전의 체험에 머무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요마와의 싸움은 기
왕의 성취와 그 자부심을 버리는 일이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왕의 성취
를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는 입장에 있는 것이고, 이것이 성철스님의 돈오
돈수적 입장과 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손오공이 스스로 마왕이 되는 과정을 보자. 손오공은 혼세마
왕의 난을 겪은 직후 수렴동을 요새화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소박하게 대
나무와 나무 따위로 창, 칼을 만들어 원숭이들을 훈련시킨다. 그러다가 인
간 세상의 무기고를 털어 정식으로 무장을 한다. 그 위엄에 온 세상의 짐
승과 요괴들이 그를 왕으로 떠받들게 된다. 수렴동은 철통 요새가 되고, 화
과산은 절대적 자아왕국이 된다.
손오공은 도술을 익히고 혼세마왕을 물리친 주체로서의 나에 집착한다.
혼세마왕을 물리치던 순간의 초월과 해방의 체험! 그것이야말로 더욱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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