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8 - 선림고경총서 - 02 - 산방야화
P. 108
106
밝혀 종일토록 폭포 같은 변론을 쏟아놓는다 해도,변론한 내용
에다가 변론한다는 자체까지도 모두 미혹이니 따져 볼 것도 없
이 이미 그 이전에 미혹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께서는,설산(雪山)에서는 깨달은 그림자만
을 보이셨고,최후로 백만 대중 앞에서 꽃 한 가지를 들어 깨달
은 이치를 나타내셨습니다.조사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이
서로 동일하지 않았으나,가까이하기에는 마치 불무더기와 같았
고,살에 닿기에는 태아(太阿)의 검처럼 날카로웠으며,듣기에는
우레와 같이 우렁차고,마시기에는 독약같이 무서웠습니다.그러
나 이와 같이 어묵동정(語黙動靜)하는 사이에 끝내 학인들에게
지름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데는 다 까닭이
있었습니다.그리하여 종문(宗門)에서는 깨달았다는 자취를 용납
하지 않았으며,또한 그것을 법진(法塵)이라고 비난했고,견해의
가시라고 배척하였습니다.종문에서 이렇게 한 것은 미(迷)와 오
(悟)를 둘 다 잊어버리고 신령한 근원에 젖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혹 이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아는 것으로 걸핏
하면 허망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봉사가 횃불을 들고 대낮에 길
에 나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이렇게 하는 것은 길을 밝히는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계속 횃불을 들고 있다가는 손마저 태
우게 될 것입니다.
나 또한 진지(眞知)에 걸려 있는 사람으로서 망지(妄知)를 쓴
다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다만 그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나 자신을 경책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