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5 - 선림고경총서 - 12 - 임제록.법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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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록 225
자소스님은 끝내 대꾸가 없었다.이로부터 스님에게 참례하
여 자기의 견처를 밝히긴 하였으나,다시 개당하진 않았다.
스님의 인연이 금릉(金陵)에 닿아 큰 도량에 세 번 앉아서 아
침저녁으로 선풍을 폈다.그때 여러 총림에서 모두 그 가풍과
교화를 따랐으며,다른 나라에서도 스님의 법을 흠모하는 자들
이 먼 길을 찾아와 양자강 밖에서 현사(玄沙)스님의 정통적인
가르침이 다시 펼쳐졌다.스님은 근기를 알아보고 상대에 맞추
어 막힘과 미혹을 깨주었다.제방의 선(禪)을 가르치니 혹은 입
실(入室)하여 자기 견해를 밝히거나 혹은 묻고 법을 청하였는데,
모두 병에 따라 약을 써서 근기대로 깨친 자들은 이루 다 기록
하지 못할 정도였다.
주(周)나라 현덕(顯德)5년 무오(戊午)7월 17일에 병을 보이
자,임금이 몸소 예의를 갖추어 문병하였다.윤달 5일에 머리 깎
고 목욕하고 대중에게 말씀을 마치자 가부좌하고 가시니,얼굴
과 모습은 살아 있는 듯하였다.나이는 74세,법랍은 54세였다.
성안의 모든 절에서는 법도를 갖추어 맞이하였으며,공경(公
卿)이건훈(李建勳)이하는 소복(素服)을 하였다.스님의 온전한
몸을 강녕현(江寧縣)단양(丹陽)에 모시고 탑을 세웠으며,시호는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탑명은 무상(無相)이라 하였다.
그 뒤 이국주(李國主)가 보자원(報慈院)을 짓고,스님의 문도
로서 깊이 깨치신 행언(行言)스님에게 법을 펴도록 명하였다.그
리고는 다시 대지장대도사(大智藏大導師)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