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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장 227
惠琪)를 보내 스님을 청하여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홍무(洪武)4년(1371)신해 7월에 신돈이 분수 밖의 일을 넘겨
보므로 현릉은 그를 베어 죽이면서 “내 스승이 어찌 거짓말을 했
겠는가”하였다.그리고는 예부상서 홍상재(禮部尙書 洪尙載)와 내
시 이부(李榑)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스님을 국사(國師)로 높여
봉하고 법호를 내렸다.그리고 다시 스승의 모향(母鄕)으로서 본래
익화현(益和縣)이던 양근(楊根)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그리하여
영원사(瑩原寺)에 머무르시기를 청하였으나 스님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셨다.그러나 칙명이 있었으므로 절 일을 7년 동안 멀리서
맡아보셨다.
무오년(1378)겨울에 지금 임금(우왕)의 명을 받들어,비로소 그
절에 가시어 1년 동안 머무르시다가 돌아오셨다.
신유년(1381)겨울에 양산사(陽山寺)로 옮기셨는데,부임하시던
날에 우왕은 스님을 다시 국사로 봉하였으니,그것은 선군(先君)을
생각해서였다.
임술년(1382)여름에 스님은 “돌아가자,돌아가자”하시고,곧
소설산으로 돌아가시니 대중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이 해 연못에
는 연꽃이 마르고 소나무 여덟 그루 중에서 네 그루가 말랐다.겨
울 12월 17일에 가벼운 병을 보이시더니,23일에는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酉時)에는 내가 떠날 것이니,지군(知郡:군수)을 청하
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하셨다.
그때 이양생(李陽生)이 양근 군수로 있었는데,스님은 그에게
왕께 올리는 유언을 남기고 또 대신들에게 세상을 하직하는 글
여섯 통을 써 주셨다.이튿날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