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6 - 선림고경총서 - 21 - 태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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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울게 되었다.
계묘년(1363)정월에 왕은 서울로 돌아와,성균관 제주 한천(成
均館 祭酒 韓蕆)을 보냈으므로 스님은 가지사(迦智寺)로 옮겨 종풍
을 크게 떨쳤다.
그때 신돈(辛盹)이 승려의 행색을 빌려 왕의 사랑을 받고 아첨
하였으므로 어진 이들은 매우 두려워하였다.스님은 나라의 위태
로움을 생각하고 개탄하며,글을 올려 신돈에 대해 이렇게 논하셨
다.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승(眞僧)이 제 뜻을 펴고,나라가 위태로
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왕께서 살피셔서 그를 멀리
하시면 국가에 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신돈은 재상의 이름을 빌려 조정의 신하를 함
부로 죽였다.스님은 일이 다 되었다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시다
가,병오년(1366)겨울에 신돈의 독한 마음을 아시고 인장을 돌려
왕사의 지위를 하직하고 도솔산에 들어갔다가 구름처럼 노닐면서
전주 보광사(普光寺)로 가서 머무르셨다.
무신년(1368)여름에 신돈은 말을 퍼뜨려 스님을 매장시키려
하였는데,그 음모와 간사한 꾀로 못 할 짓이 없었다.너무 절박
하게 말했기 때문에 현릉은 할 수 없이 그 말을 쫓았다.신돈은
일을 벌여 스님을 속리산(俗離山)에 가두었다.스님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도 그것에 편안해하여 조금도 원망하는 빛이 없으셨다.
어느 날 저녁에는 선정에서 일어나 “나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신
돈이 가련하구나”하셨다.
기유년(1369)3월에 현릉이 후회하고 승록사원 혜기(僧錄司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