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고경 - 2015년 4월호 Vol.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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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참선을 가르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경성에
                 일시 선풍(禪風)이 성행하였다’는 대목은 매우 시사하는 바
                 가 큽니다. 개화당은 주로 동대문 밖 개운사, 탑골승방, 화계

                 사, 신촌 봉원사 등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참선을 했습니다.
                 개화당은 유교의 한계를 느끼고 불교의 선 정신으로 나라의
                 혁신을 도모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개화당 거사들의 갑신정변은 실패

                 로 끝났습니다. 청군의 개입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촉망 받던 청년 거사들이 참선을 해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한 개화당 거사들의 좌절은 불교계에도 큰 손실
                 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개화당 거사 결사의 불교사적인 의

                 의가 다시 조명되기를 바랍니다.


                   경허와 용성의 결사와 선풍 재건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10년 만에 동학혁명이 일어

                 났고, 이로 인하여 조선은 국정 쇄신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
                 다. 이때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도 해제되고, 남북한산성의 승
                 군제도도 폐지되고 불교계에도 새 시대가 열립니다.

                   이때에 경허 (1846~1912) 스님이 나옵니다. 23세에 동학사
                 에 이름 높은 강사였던 스님은 콜레라가 휩쓸고 간 마을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생사문제가 급하다 여기고
                 화두 참선에 매진하여 마침내 1879년 오도송을 읊었습니

                 다. 그 뒤에 호서지방의 천장암, 부석사, 수덕사 등 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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