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고경 - 2015년 4월호 Vol.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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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혹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거나 그리고 공덕만을
바라니 보리 (菩提)와는 틀렸고 도(道)에는 멀어짐이로다.”
- 「가야산 해인사 수선결사문」, 『경허집』
경허 스님이 지은 「결사문」에 보듯이 당시는 선풍(禪風)이
쇠퇴하고 염불하거나 경을 보고는 조사(祖師)의 가르침은 외
면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선방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그런
데, 경허 스님이 조실로 추대되고는 선방도 수리하고 안거
결제도 여법하게 다시 하면서 수선 결사를 해서 선풍을 진
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사에는 젊은 한암 스님이 서기를 맡고 있었는데, 뒷
날 오대산 월정사 조실로 추대되어 선원을 개설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조계종을 재건할 때 초
대 종정으로 추대되는 등 큰 역할을 합니다.
1899년 세기말에 해인사
동안거에서 결사를 추진한 경
허 스님은 이후 김천 수도암,
통도사, 범어사, 송광사, 선암
사, 화엄사, 실상사 백장암 등
영호남의 주요 사찰을 다니며
선원을 재건하고 안거 결제 전
통을 복원하여 선풍을 다시
일어나게 합니다.
경허 스님 진영 경허 스님이 이렇게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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