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고경 - 2015년 4월호 Vol.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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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득하지 못한 깨달음은 풍월이나 겉멋에 지나지 않는다.
가히 밥맛과 같아서 구경하거나 참고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
니다. “모름지기 안거 (安居)에 든 납자라면 방금 싸운 사이
처럼 상대를 대해야 한다.”는 선가(禪家)의 충고는, 스스로에
대한 몰입을 강조하는 당부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양심과
가치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숨어 있는 만큼 소중하고 몰
라주는 만큼 절박하다. 나에게 최고의 동반자는 나다.
‘조주’는 조주종심 (趙州從諗) 선사를 이른다. ‘개에겐 불성
이 없다’, ‘뜰 앞의 잣나무’, ‘차나 마시게’ 등 역대 최다의 공
안(公案, 공인된 화두)을 남긴 인물로, 그만큼 촌철살인에 강했
다. 그런데 ‘입으로 선을 가지고 놀았다’는 구순피선 (口脣皮
禪)의 대가는, 유독 이 대목에선 말을 아끼고 있다. 화두를
풀이해주겠다고 해놓곤 하루가 지나 뜬금없이 설명을 종료
한다고 선언한 처사는 의뭉스럽다. 어쩌면 ‘해주겠다’와 ‘끝
마쳤다’ 사이의 비약과 여백에 답이 있을 것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
는 일 정도다. 고작 그것밖에 없음으로, 끝마쳤다고 태연하
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갑질’에서 보듯 살아 있
음의 권리는 남이 가져가기 십상이지만, 살아 있음의 책임
은 오로지 내게만 부과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
람에게 줄 수 있는 건, 사랑뿐이다. 인생의 허다한 나머지는,
기어이 그 인생을 짊어진 자의 몫이다. 각자의 몸에 묶인 마
음은 그 몸 안에서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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