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고경 - 2016년 8월호 Vol.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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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부인이 신랑보다 30년을 더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조보다 먼저 죽은 원비에게는 지아비의 장지 선택권이 전
                혀 없었던 것이다.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둘째 부인은 정

                조와 나이 차가 많았다. 영조 사후에도 ‘대비마마’로 정치적
                위세가 대단했다. 그 영향력이 묏자리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
                다. 어쨌거나 역사는 끝까지 살아 남은 자에게 우선권이 주어

                진다. 착한 조강지처를 연민하게 만든 산책길이다. 차라리 (화
                장하여) 왕릉이 없었다면 왕가의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았을
                텐데.


                  ● 매장법과 화장법을 동시에 만족시키다

                  한반도에서 왕의 장례식으로 화장법을 선택한 것은 신라
                문무왕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감포 앞바다 바위에 산골했고
                그 바위는 해중릉이 되었다. 화장을 해도 왕릉은 남는다. 사
                실 왕릉이라기보다는 자연산 바위가 왕릉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대왕암이다. 해안가를
                따라 멀지 않은 울산의 울기등대 앞바다에는 문무왕비가 묻
                혀 있다는 바위가 구전으로 전해온다. 왕비암이 아니라 그냥
                이것도 이름은 대왕암이다.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금

                슬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저 한 쌍의 호국룡으로 숭앙될 뿐
                이다.
                  인도는 화장이 대세다. 중국은 매장이 관례다. 두 장례법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충돌한다. 저항이 만만찮았다. 법

                왕(法王) 대접을 받는 인도의 28조는 대부분 정형화된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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