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고경 - 2018년 7월호 Vol.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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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과 여러 국가의 등장
여덟 왕이 목숨을 걸고 한발 짝도 물러설 수 없는 극한적인 대립을 벌였
기에, 각 진영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모으려 노력
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싸움과 전쟁은 힘 즉 군사력을 필요로 한다.
군사력의 기초는 병졸이다. 당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병력 자원이 가장 많
은 곳은 흉노凶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 등 다섯 민족이었다. 그 가
운데서도 흉노족 -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부른다 - 이 가장 많았다.
진秦나라부터 한나라 무제 유철(劉徹. 기원전 156∼기원전 141∼기원전 87) 이전
까지 중국 변방의 역사는 흉노와의 대결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무제
때 곽거병 등의 공격에 결정적 타격을 받은 흉노는 후한 시대 접어들어
남·북 흉노로 분열된다. 남흉노는 친한파親漢派, 북흉노는 반한파反漢派였
다. 내부 알력의 결과 남흉노는 후한에 항복했다.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 유
수(劉秀. 기원전 6∼기원후 25∼57)는 이들을 산서성 북쪽 병주幷州에 살도록 했
다. 후한 조정은 이들에게 변경방위의 의무를 맡기고, 사흉노중랑장使凶奴中
郞將을 파견해 그들을 감독·감시했다. 그러던 서기 89년 후한과 남흉노가
연합해 북흉노를 공격했고, 패퇴한 북흉노는 서방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유
럽 민족이동의 원인이 된 훈족의 선조라고 학자들은 주장하기도 한다.
흉노가 괴멸되자 흉노와 연계되어 있었던 강羌족도 자연스레 하나 둘 정
복돼 관중지방(섬서성 일대. 중심지는 서안)에 강제로 이주됐다. 저氐족의 상황
도 비슷했다. 감숙성 일대에 머물던 저·강족들은 당시 조정의 이주정책
에 점차 관중으로 들어왔다. 관중 인구 100만 가운데 절반이 융적戎賊이라
고 할 정도로 그 수가 점차 늘어났다.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된 소수민족의
사회적 위치는 열악했다. 노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후한·위나라·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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