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고경 - 2018년 7월호 Vol.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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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한족漢族 정부가 강성할 땐 이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집권세력
           의 권력투쟁이 격화돼 소수민족들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서서히
           변했다.

             팔왕의 난은 이런 변화의 불[火]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성도왕 사

           마영(司馬潁. 279∼306)의 근거지는 하북성 임장현 즉 업성鄴城 부근이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흉노 부락이 있었다. 사마영은 흉노의 힘을 빌리기 위
                                                            8)
           해 좌현왕左賢王이라 칭하는 흉노족 유연(劉淵. ?∼304∼310) 을 장군으로 임
           명한 후 업성에 억류하고는 흉노 병사를 징발하는 임무를 맡겼다. 우여곡

           절 끝에 업을 탈출해 304년 음력 8월 산서성의 흉노 부락으로 돌아온 유연
           은 자립할 뜻을 굳혔다. 대선우가 된 그는 304년 음력 10월 산서성 이석離
           石에서 독립국 한漢을 세웠다. 한漢국 성립은 저족氐族 이씨가 사천성 성도

           에서 성국(成國. 304∼347)을 세운 것과 더불어 십육국 시대의 개막을 알리

           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팔왕의 난이 진행됨에 따라 유연을 따르는 무리
           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유연은 309년 포자(浦子. 산서성 濕縣)에서 황제 자
           리에 올랐다. 309년 음력 1월 산서성 평양平陽으로 천도했으나 310년 음력

           7월 그곳에서 병사했다.

             유연의 건국을 시작으로 소수민족 자립의 분위기는 날로 고양되어 갔
           다. 서진 회제 사마치(司馬熾. 284∼306∼313)가 즉위할 무렵 유연을 중심으
           로 한 흉노 세력은 더 커졌다. 게다가 요서 지방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

           우문씨宇文氏·단씨段氏 등도 자립할 뜻을 품고 있었다. 유연에 이어 아들







           8)  흉노 선우의 자손인 유연은 그의 조상이 한나라 왕실과 통혼한 사실을 들어 성을 유劉씨로 정했다. 한
             왕조의 피를 이었기에 서진왕조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재흥하겠다는 뜻을 담아 나라 이름을 한漢으
             로 명명命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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