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고경 - 2018년 7월호 Vol.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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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385년 음력 7월 부견은 부하였던 강족羌族 요장姚萇에게 사로잡혀, 신평
           (新平. 섬서성 彬縣)에 위치한 석불사石佛寺로 압송됐다. 8월 요장은 부견에게
           사람을 보내 옥새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고, 부견은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요장은 석불사에서 부견의 목을 매달아 죽여 버렸

           다. 권모술수와 배신이 넘쳐났던 분열과 전란의 시대, 한 때의 주군을 죽
           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장이 죽을 운
           명에 처했을 때 부견이 구해준 것을 아는 요장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영웅

           의 비극적 결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인의와 신의로 적들을 감화시키고자 노력했던 명군 부견은 가슴에 회
           한悔恨만 가득 품은 채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 그가 사라
           지자 화북지방은 다시금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하 통

           일에 대한 부견의 꿈과 저족氐族의 희망도 흙먼지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부홍(苻洪. 285∼350∼350)이 350년 장안에 건립한 전진이라는 나라는 후세
           사람들에게 숱한 아쉬움을 남기며 394년 역사의 전면에서 허무하게 물러
           나고 요장의 후진(後秦. 384∼417)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후진은 요장의 아들 요흥(姚興. 366∼394∼416)이 즉위한 뒤 비약적

           으로 발전한다. 부견처럼 요흥 역시 불교를 진흥시켰다. 구마라집(鳩
           摩羅什. 343∼413)과 승조(僧肇. 384∼414)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시
           기도 바로 이 때다. 그러나 후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요흥이 죽은

           후 내부분열이 일어나 숨만 헐떡이는 환자로 변했다. 동진의 거기장

           군 유유(劉裕. 363∼420∼422)가 그 틈을 비집고 장안에 치고 들어와 후
           진을 멸망시켰다. 유유가 겨우 주둔군만 남겨놓고 남경으로 돌아가
           버리자, 북쪽에서 장안을 노리고 있던 흉노와 선비의 혼혈족 출신인

           혁련발발(赫連勃勃. 381∼407∼425)이 남하하여 동진의 주둔군을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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