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고경 - 2018년 7월호 Vol.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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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전진의 부견에게 376년 멸망당한 대국代國의 왕 탁발십익건(拓
           跋什翼健. 318∼338∼376)의 손자 탁발규(拓跋圭. 371∼386∼409)가 386년
           대동大同과 호화호특呼和浩特의 중간에 있는 우천牛川에서 대왕代王으로

           추대되었다. 얼마 뒤 국호를 위魏 - 북위(北魏. 386∼534)가 이것이다

           - 로 고쳤다. 당시 힘이 약했던 북위는 후연에 복속되었으나, 세력을
           키워 396∼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접수하는 등 황하 이북의 화북평
           원 대부분을 정복했다. 398년 탁발규는 수도를 평성(산서성 大同)으로 옮

           기고 황제에 올랐다. 이가 바로 북위 태조 도무제道武帝다. 도무제에 이

           어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른 명원제(明元帝. 392∼409∼423)는 착실히 국력
           을 키웠다. 탁발도가 태무제(太武帝. 408∼423∼452)로 제위를 계승하면서 북

           위는 주변 여러 나라들을 복속시켜 나갔다. 하(夏. 407∼431), 북연(北燕.
           407∼436), 북량(北凉. 401∼439) 등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439년 화북을 완전

           히 통일해 십육국 시대를 종결지었다.
             북위가 십육국 시대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화북지방을 제패하고 비교적
           긴 시간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주요한 이유 가

           운데 하나는 장성 밖에 같은 유목민족 집단이 있어 끊임없이 인원과 말 등

           을 보급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소수였던 흉노족·저족·강족과 달리
           동족의 인구가 많아 병졸로 충당할 수 있는 가용자원이 그만큼 풍부했다.
           물론 태조 도무제 이래 북위의 선대 지도자들이 ‘부락제’를 해체하고, ‘세

           습 부락장 제도’를 폐지하는 등의 체제 개혁을 단행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습 부락장 제도’가 해체됨으로써 부족의 우두머리가 군권을 장
           악하는 ‘종실적 군사봉건제’가 더 이상 발붙이기 힘들어졌고, 흉노족·저
           족·강족 등이 겪어야 했던 격렬한 내부분열의 원인 또한 사라졌다. 이런

           노력의 결과 북위는 상대적으로 긴 역사를 후대에 남길 수 있게 됐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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