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고경 - 2018년 7월호 Vol.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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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가 이와 비슷합니다.”
14)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견은 결국 동진(東晉. 317∼420)을 병합해 천하
를 통일하려는 결심을 확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강남 정벌을 준비하던 379
년 전진前秦의 10만 대군이 양양을 공략하고 68세의 명승이자 고승인 도안
스님(道安. 312∼385)을 장안으로 초치招置했다. 그 때부터 도안은 부견에게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도안조차 동진 정벌을 만류했다. 지극히 도
안을 존중한 부견이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동진 정벌을 반대하는 도안의 권
고만은 듣지 않았다.
명승 도안의 권고
부견이 도안을 얼마만큼 존중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진서晉書』권
114 「재기載記제14 부견苻堅 하下」에 실려 있다.
“동쪽 정원에 놀러갈 때, (부견이) 도안을 마차에 태우도록 했
다. 그러자 신하 권익權翼이 간언했다. ‘천자의 어가御駕에 시
중(대신)이 탈 수 있고, 길을 갈 때엔 도로의 사람들을 흩어지
게 한 후 가며, 나아감과 물러섬에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14) “ 臣光曰: ‘論者皆以爲秦王堅之亡, 由不殺慕容垂、姚萇故也.’ 臣獨以爲不然. 許邵謂魏武帝治世之能
臣, 亂世之奸雄. 使堅治國無失其道, 則垂、萇秦之能臣也, 烏能爲亂哉! 堅之所以亡, 由驟勝而驕故.
魏文帝問李克, 吳之所以亡, 對曰: ‘數戰數勝.’ 文侯曰: ‘數戰數勝, 國之福也, 何故亡?’ 對曰: ‘數戰則
民疲, 數勝則主驕, 以驕主御疲民, 未有不亡者也.’ 秦王堅似之矣.” [北宋]司馬光 編撰, 『자치통감신
주資治通鑑新注』第4冊, 西安:陝西人民出版社, 1998, p.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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