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고경 - 2018년 7월호 Vol.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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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나무, 산, 강, 토양 같은 무수한 현상[事]들이 빚어내는 유기적 관계와
            질서가 곧 연기법이다. 따라서 현상과 본질, 작용과 본체는 분리된 것이 아
            니라 하나의 체계 속에 있다.

              이사원융의 의미를 설명하는 첫 번째 원리는 ‘사허이실事虛理實’이다. 눈

            앞에 드러난 현상과 작용으로써 사事는 실체 없는 허상[事虛]이고, 그 이면
            에 있는 이법이 진짜 실상[理實]이라는 것이다. 한 송이 꽃은 작용이고 개
            별적 현상[事]이므로 실체가 없다. 처음부터 꽃이었던 것도 아니고, 영원히

            꽃인 것도 아니며, 스스로 꽃인 것도 아니다. 꽃이라는 개별적 작용, 개별

            적 현상으로서의 존재는 연기라는 보편적 이법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기 때
            문이다.
              현상은 실체가 없음으로 피고 지는 꽃처럼 흘러가고 변화하지만 이법은

            실상이므로 영원하다. 이理는 고착화된 형상으로 머물지 않음으로 무상無

            相의 특징을 갖고 있다. 무상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무수한 현상으로 드
            러날 수 있다. 귤은 어디서나 귤이 아니라 회수를 건너가면 탱자가 되는 것
            도 이런 이치다.

              물론 현상[事]도 현상으로 고착화된 것이 아니라 현상 자체가 또 다른

            이理로 작용한다. 여기서 이사원융의 첫 번째 명제인 “연기하는 사법[緣起
            事法]은 허공처럼 자성이 없으므로[虛空無性] 전체가 온전히 이理”라는 명제

            가 성립한다. 한 송이 꽃은 그 자체로는 실체 없는 현상이므로 무자성無自
            性이다. 꽃은 무수한 존재들의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드러남으로 눈앞에

            드러난 꽃은 허상이고, 우리가 보는 현상의 본질은 연기라는 이법이다. 그
            래서 무수한 현상을 보지만 그것은 물거품일 뿐이며 실상은 이법이다. 여
            기서 개별적 현상은 공空한 것으로 부정되고, 현상의 이면에 있는 이법이

            실상으로 긍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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