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고경 - 2018년 9월호 Vol.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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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351), 티벳계 저족 부苻씨의 전진(前秦. 350∼394), 강족 요(姚)씨의 후진
(後秦. 384∼417), 흉노족 저거沮渠씨의 북량(北凉. 401∼439) 등이다. 당시 상
황을 잘 보여주는 말이 있다. 도안이 한 말로 『고승전·권5·석도안전』에
전한다.
“나라의 군주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붓다의 일을 이루기 힘들다.
교화의 기본은 마땅히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이다.” 25)
도안의 말처럼, 당시는 군주에 의지하지 않으면 불교를 홍포하기가 힘
든 시대였다. 중국불교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한족漢族의 출가도 후조의
군주 석호가 허락해 비로소 시작됐다. 불교가 전래된 전한 말 후한 초 이
래 사찰은 있었다. 반면 한인漢人 출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
며 주사행朱士行·엄불조嚴佛調 등 개별적으로 출가한 한인은 생겼다. 국가
가 공식적으로 출가를 허락한 적은 없었다. 그 금제禁制를 후조 제3대 군주
석호(石虎. 295∼334∼349)가 깨트렸다. 관련 기록이 『고승전·권9·축불도
징전竺佛圖澄傳』에 남아 있다. 약간 길지만 전부 인용할 필요가 있다.
“불도징의 덕화德化가 행해지자 많은 백성들이 붓다를 받들고,
모두들 사찰을 건립했다. 서로 다투어 출가해 진짜와 가짜가 뒤
섞여 허물과 과오가 많이 생겼다. 석호가 조칙을 내려 중서령에
25) “不依國主, 則法事難立, 又敎化之體, 宜令廣布.” [南朝梁]釋慧皎撰·湯用彤校注, 『高僧傳』, 北京:中
華書局, 1992,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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