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2 - 고경 - 2018년 9월호 Vol.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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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주사행朱士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영천穎川에서 태어난 그는 출
                                               34)
           가해 수계를 받은 최초의 한인漢人이다. 국가가 공인한 것은 아니었다. 불
           교 홍포에 뜻을 둔 그는 오로지 경전 연구에만 몰두했다. 낙양에서 『도행

           반야경』(『소품小品』)을 강의하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뜻이 완전히 드러

           나지 않음을 알았다. “이 경은 대승의 요체다. 번역이 이치를 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맹세코 뜻을 세워 목숨을 버리더라도 멀리 가서 대품을 구할
           필요가 있겠다.” 마침내 위나라 감로 5년(260) 옹주(지금의 섬서성 서안)를 출

           발해 타클라마칸 사막의 유사流沙를 넘어 우전(지금의 신강성 허텐和田)에 도

           착했다. 20여 년 동안의 고생한 끝에 마침내 산스크리트어로 된 정본正本
           90장章을 구했다.
              몇 년 뒤인 서진 태강 3년(282) 제자 불여단不如檀에게 범본梵本을 줘 낙

           양에 돌아가게 했다. 불여단이 경전을 갖고 가지 못하도록 우전국 사람들

           이 왕에게 참소했다. 주사행이 불교 홍포 이외 다른 뜻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타오르는 장작불에 경전을 던졌다. “한지漢地에 대승의 가르침이 유
           통되고자 한다면 경전은 당연히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가피가 없다

           면 운명이니 그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서원을 마치고 불에 던졌다. 글자

           가 한 자도 타지 않았다. 표지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신이를 직접 본 우
           전국 왕과 사람들은 감복했다. 경전을 하남성 진류陳留로 가져갈 수 있었
           다. 291년 그곳의 수남사水南寺라는 절에서 거사 축숙란과 서역에서 온 스

           님 무라차가 함께 번역했다. 이것이 『방광반야경』(20권)이다. 그러나 주사








           34)  주사행의 전기는 아래의 책에 있다. 『고승전·권9·주사행전』, 『출삼장기집·권13·주사행전』, 『역
              대삼보기·권6·주사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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