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고경 - 2018년 10월호 Vol.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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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는 ‘탄생의 첫날이 죽음의 첫날’이라 생각한다. 이럴 때 죽음은
           멀리서 어렴풋하게 보여서 불안감, 공포감만 커지며 마치 복면한 강도 같
           은 환영을 가져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상’(相=想), 이미지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상=개념이 우리를 무섭게 한다. 『금강경』에서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열반도 없고 번뇌도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삶의 영역 내에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지성으로 죽
           음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와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면 편견

           없이, 삶이 어차피 이행해가야 할 자연스런-당연한-올바른 이해를 할

           길이 열린다. 그 결과 죽음은 어둠=불안=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빛=안
           심=수용의 대상으로 바뀐다. 동양에서는 이런 것을 ‘지천명’(知天命: 천명

           을 앎)에서 ‘외천명’(畏天命: 천명을 두려워 함)으로, 외천명에서 ‘낙천명’(樂天
           命: 천명을 즐김)으로의 전환으로 인식한다. 천명은 자연의 섭리가 만든 운

           명 혹은 숙명을 말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래야 어쩔 수 없는 사태를
           말한다.



             어쩌다 죽음에서 제대로 죽기



             죽음을 수동적으로 망상하는, 그 꽁무니나 뒤따르며 불안해하는, 무
           섭고 두렵고 차갑고 우울한 것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제대

           로 이해하면, 그 면전에 서서 바라보며 심지어 그를, 비껴가는 것이 아

           니라, 추월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죽음을 나 자신의 주체적 문
           제로서 바꾸고, 죽음에 대한 독해력, 그것을 바라보는 안목의 해상도를
           높여가야 한다. 그럴 때 죽음은 따뜻하고 명랑하고 유쾌하며 해학적이

           며 밝은 것이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섭리를 즐기는 ‘낙도樂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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