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고경 - 2018년 10월호 Vol.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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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것은 죽음을 결정론적 차원에서 자유의 차원으로 전환하는 일
이다.
기계는 죽음이 없다. 해체되고 사라질 뿐이다. 가끔 영화 속에서는 깨닫
고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인공지능이 있긴 하나 현재까지는 공상이다. 마찬
가지로 동물에게도 죽음이 없다. “동물들은 죽음을 죽음으로서 제대로 경
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동물은 제대로 죽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나자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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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내팽겨쳐질 뿐”이라고 철학자들(하이데거, 데리다)은 생각한다. 너무
인간중심적인 이해방식일 것 같으나, 일단 동물들이 주체적으로 죽음을 생
각하고, 느끼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어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죽어갈 수 있다. 죽음을 제대로 알고,
잘못된 관념(=독사)을 벗어나 제대로 된 바른 앎(에피스테메)을 확보할 수 있
기 때문이다.
라틴어의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즐겨라!’는 것은 동서양이 통한다. 죽
음에 대해 그릇된 상상·잘못된 관념을 벗어나, 제대로 된 바른 앎을 가지
고 사는 연습은 생애의 주요 일과로서 매일매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죽음의 불안·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죽음의 의미를
자발적, 능동적으로 음미하면서, 순간순간의 자각 속에서, 삶을 더욱 진지
하고 탄탄하게 살아가는 촉진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란, 하이
데거에 따르면 ‘알고 있고, 해명할 수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해명할 수 있으며, 자
신의 말로 이야기 할 정도라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고 하겠다. 이
5) 이왕주, 「어느 개죽음, 한심한」, 『상처의 인문학』, (다음생각, 2014),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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