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고경 - 2018년 11월호 Vol.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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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구절에서, 진제·속제는 불교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門이기에, 「종
본의」 다음에 이제를 해설한 것이다. “다만 부처가 될 올바른 종자를 원만
하게 하는 것은 위없는 반야뿐이다.”는 구절은 바로 「반야무지론」을 말한
것이다.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종자는 반야 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극한 과보는 오직 열반뿐이다.”는 반야를 통해 얻는 지극한 과보는 오
직 열반의 진리일 따름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여러 가르침이 드나드는 현
묘한 문을 열었다.”는 것은, 반야라는 인因과 열반이라는 과果외에 더 보탤
것이 없어 마지막에 두 가지 현묘한 가르침을 설명했다. 반야가 하나의 현
묘함이요, 열반이 또 다른 하나의 현묘함이다. 앞에서 말한 진제·속제는
「부진공론」과 「물불천론」을 가리키며, 뒤에서 말하는 현묘함은 「반야무지
론」과 「열반무명론」을 말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 달리 설명하려고 노
력할 필요가 없다. 『노자』에서 “현묘하고 또 현묘하니 모든 현묘함이 드나
드는 문이다.”고 말했는데, 중현重玄이라는 단어는 지금 『노자』의 이 말을
빌려 열반·반야를 표현한 것이다. 깨달은 여러 성인들이 모두 열반에 머
물고 있기에 집[宅]으로 이름을 붙였다.
[단락 ③은 “대저 ‘본성상 공[性空]’하기에 그것을 일러 본무라 한다. 그래서 종지를 밝혀
세우고자 실상을 드러냈다. 공을 열어 가르침을 밝힘(배움)에 진제·속제를 벗어나지 않는
다. 때문에 (「종본의」) 다음으로 이제를 설명해 불교에 들어가는 문을 드러냈다. 다만 부처가
될 올바른 종자를 원만하게 하는 것은 위없는 반야뿐이며, 지극한 과보는 오직 열반일 따
름이다. 마지막에 여러 가르침이 드나드는 현묘한 문을 열었고, 깨달은 여러 성인들이 모
두 머무는 집인 열반을 밝혔다.”로 옮길 수 있다.]
④ “雖以性空擬本, 無本可稱”下, 第二遣相也. “語本絶言, 非心行處”
者, 言本則是絶言之處, 故非心所能行也. “然不遷當俗, 俗則不生”者, 道不
遷則是不生也. “不眞爲眞, 眞但名說”者, 道不眞爲眞, 但是假名說耳. “若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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