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0 - 고경 - 2019년 5월호 Vol.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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敍』를 지었으며, 송의 원가元嘉 중(424~453) 85세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② 그 이후 송宋나라 지반志磐이 편찬한 『불조통기佛祖通紀』에서 『고승
전』의 「혜예전」을 「승예전」으로 기록하였는데, 근대에 와서 몇몇 학자들이
이와 연관하여 시비를 논의하였다. 그 둘의 출신 지역, 입몰년도, 행적,
장안에 간 시기 등이 서로 달라,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
나 나중에 발표된 한 논문에 의하여 결국은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제안되
었고, 그 이후 대체로 수용되고 있는 편이다.
그 요지를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출생지 장락長樂(하북성河北省 기
현冀縣)과 기주冀州는 서로 다른 곳이 아니고, 장안에서 입몰한 67세는 승
예가 흉노의 침략을 피해 남지로 건너간 시기로 볼 수 있고, 후진 멸망후
남지 건강으로 가서 기원사祇洹寺 오의사烏衣寺에 거주하여 송宋에서는 혜
예로 불렸고, 『십사음훈서十四音訓敍』를 저술하고 음역 고훈 등에 통효한
것은 번역 사업에 참여한 지식에 따른 것이며, 『고승전』에 승예와 도안道
安의 사제관계와 혜예의 저술 『유의론喩疑論』이 누락된 것은 『출삼장기집
出三藏記集』의 기사를 보고 빠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9)
③ 혜예와 승예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나면, 승예의 업적과
위상이 더욱 보강된다. 우선 저술에 있어서도 삼론의 서문과 대품경 소품
경의 서문 외에, 『십사음훈서』가 추가되고, 혜예의 저작 『유의론』도 길장
의 저술에 인용되어 있다.
삼론학의 강남 전파라는 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 이행하였다. 북
8) 『고승전』 제7권, 「석승예」.(T50-p367ab)
9) 橫超慧日, 「僧叡と慧叡は同人なり」.(『東方學報』, 東京第十三冊ノ二, 194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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