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6 - 고경 - 2019년 5월호 Vol.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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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 오자 찾아가 수학하였다. 그 때 도항의 동학 도표道標도 재능이 있
어, 후진後秦의 요흥왕은 도항과 도표가 나라를 운영할 만한 역량이 있는
것을 알고, 법복法服(승복)을 벗고 상서령尙書令(진秦 나라 때에 천자와 신하들
간에 문서文書를 주고 받는 일을 담당한 요직으로, 후대의 장관에 해당함)을 맡아 국
정에 힘쓰라는 칙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 둘은 불법佛法을 학습할 뿐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사양하였다. 다시 왕이 구마라집과 승주僧主
2)
(승정僧正)의 직무를 맡은 승략 에게 서간을 보내 그 둘을 깨우치게 하였으
나, 은혜를 베풀어 그 둘을 놓아주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후에도 국왕은
자주 서간을 내렸으나, 나라의 온 지경이 도와 가까스로 사면되었다. 이
에 도항은 탄복하여 바위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소식
蔬食을 하며 인적 없이 살다가, 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 72세로 산중의
정사에서 입적하였다. 3)
③ 『석박론釋駁論』과 『백행잠百行箴』을 저술하였고, 『사리불비담舍利佛毘
曇』의 서문을 지었다. 불교를 학습하기 위하여 국가 관리로 중용하려는
국왕의 요구를 사양하고, 구마라집과 출중한 동문들을 떠나 인적 없는 산
중에 은거하여 학문적 저술은 별로였지만, 도항의 행적은 수행자의 본보
기로 본받을 만하여 팔준에 거론되었을 것이다.
2) 승략은 육경六經과 삼장三藏에 통달하고, 계율이 청정하여 불법을 떨칠만하여, 진작에 요흥왕의 존경
을 받았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오고 나서 모여든 승니僧尼가 많아지자, 과오를 범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하여 요흥은 승략을 승주僧主에 임명하고, 승천僧遷은 열중悅衆에, 법흠法欽과 혜빈慧斌은 승록僧錄에 취
임하였다. 승주의 직위가 곧 승정僧正으로, 이후의 승정의 흥기는 승략에게서 비롯되었다. (『고승전』 제6
권, 「승략전」.(T50-p363ab))
3) 『고승전』 제6권, 「석도항」.(T50-p364b~36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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