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2 - 고경 - 2019년 5월호 Vol.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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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양의 해 겨울 삼예사에서 성대하게 봉안법회( ཞལ་བསོས་པྲ་ཏི། )를 거행할
때 조모쩬치갸(ཇོ་མོ་གཅན་ཁ་རྒྱལ།)와 수짠몬갸(སྲུ་བཙན་མོན་རྒྱལ ) 등 대신과 백성들 백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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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출가했고, 바린뽀체(དབའ་རིན་པོ་ཆ།)가 계戒를 주는 친교사 역할을 했다. 짠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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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칙령을 내렸다. “이후부터 남자들의 눈을 파내고, 여자들의 코를 베는
참혹한 형벌을 실행하지 못한다. 대신 이하의 신하들을 비롯한 모든 백성
들은 가르침(불교)을 소중히 여길 것을 맹세하고, 맹세한 것을 비문에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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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세운다. 이후로 삼보(불·법·승)와 스님들의 음식은 왕실 창고의 물
건으로 공양하고, 스님들의 의복은 백성들이 준비해 봉헌하고, 출가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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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에게 매년 12말(ཁལ།) 정도의 식량을 제공한다.” (한편) 후일 예세왕뽀가
신통력을 얻자 짠뽀 치송데짠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 왕과 백성들의 선
지식입니다. 당신의 모습을 보니 마치 붓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곤 그를 불교계 지도자(승통僧統)로 임명했고, 가르침의 칙령(ཆོས་ཀ་བཀ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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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출가자와 신하들에게 이를 알렸다. 승통의 서열을 대신인 쟝론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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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했으며, 불교에 관한 정책을 논의하는 회의인 둔사(འདུན་ས།) 의 서열도
국정을 의논하는 소둔사(འདུན་ས་ཆུང་ངུ་།) 위에 두었다. 승통이 보낸 편지는 쟝론
을 통해 국정을 논의하는 소둔사에 전해져 읽히도록 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칙령을 왕과 대신들이 모이는 회의에서 짠뽀가 반포했다.
승통에 임명된 예세왕뽀가 “삼보의 튼튼한 의지처가 되고 영원히 (불
16) 779년 음력 11월경에 해당된다.
17) 이 비는 삼예사 대전 정문 오른쪽에 지금도 있다. 새겨진 글씨도 선명하게 보인다.
18) ཁལ།은 티베트 용량 단위이다. 우리나라 단위로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려워 대략 산출한 숫자가 12말
이다.
19) 불교정책 등을 논의하는 회의인 ‘둔사’를 통해 토번의 승통僧統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국정에 참
여할 수 있었다. 치송데짠 시기 출가자들이 이미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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