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P. 39
농사지어서 보내주시는 쌀이 떨어질 때쯤이면 어머닌 정확히 아시고
전화를 주셨다. 날마다 빠짐없이 행해졌던 어머니의 전화는 여든아홉에
돌아가시기 보름 전까지 계속되었다. 때로 바쁠 때 전화를 받으면 무성의
하게 전화를 받았던 일이 가슴 쓰린 후회로 남아있다. 이제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전화를 돌아가시고 얼마 후 꿈속에서 받았다. 생전에 전화를
자주 주셨기 때문일까, 그날도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오셨다. 너무 반가워
서 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뭐라고 입은 여시는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큰딸아이에게 꿈 얘기를 하면서 “할머니는 어디 계실까?” 했더니 아이가
상큼하게 바로 대답했다.
“엄마, 걱정 마, 할머니는 지금 파리에서 태어나셨을 거야. 그
리고 아마 할머닌 패션디자이너가 되실 거야.”
비교적 건강하게 말년을 보내셨던 어머니는 노환으로 돌아가시기 일
년 전쯤부터 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하셨다. 그렇게 삶을 마무리하시는가
보다 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다음 생애에는 무얼 하고 싶어요?”
“사업가가 되어보고 싶어.”
젊었을 적 아버지 농사를 도와주시면서도 시내에 나가면 꼭 단골 포목
점이며, 양장점을 들르면서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을 텐데’ 하셨던 어머
니다. 내생은 그만두고 이번 생에도 아마 그런 일을 했으면 아주 잘했을
텐데, 그 시절엔 여성이 밖으로 나와 사업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