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고경 - 2019년 8월호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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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여행의 첫 행로는 장안을 출발하여 고비사막과 기련산맥 사이로

           뻗은 하서회랑을 통과하는 여정이었다. 그 다음 행로는 오늘날 중국 신
           장위구르자치구에 속하는 투르판과 쿠차를 거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

           탄을 지나 인도로 들어가는 대장정이었다. 현장이 거쳐 간 구법의 행로는
           살아 돌아올 보장이 없는 여행이었다. 타는 갈증과 싸우며 끝없이 펼쳐

           진 고비사막을 가로 질러가야 했고, 험난한 설산을 넘어야 했고, 흉포한
           산적을 만나야 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다양한 문화권을 통과하는 여행이

           었다. 무수한 전법승과 구법승들은 그와 같은 역경을 넘어야만 비로소 한
           편의 경전을 역출할 수 있었다.



             고창국 국문태의 환대와 지원



             현장은 630년 서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오늘날 투르판에 해당하는

           고창국高昌國에 당도한다. 당시 고창국을 다스리던 왕은 한인漢人 출신의
           국문태麴文泰였다. 그는 현장에게 인도로 가지 말고 그곳에 머물면서 불

           법을 설해줄 것을 간청하며 길을 막았다. 현장은 왕의 부탁을 받고 고창
           국에서 한 달 간 머무르며 『인왕반야경』을 설했다. 하지만 구법여행의 결

           연한 뜻은 굽히지는 않았다.
             단식까지 불사하는 것을 보고 현장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깨달은

           왕은 출국을 허락한다. 대신 구법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고창국에 들
           러 법을 설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불심이 깊었던 국문태는 죽음의 길로

           떠나는 현장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4명의 사미승을 선발하여 동행
           시킴은 물론 승복 30벌, 황금 100량과 은전 3만 냥, 그리고 비단 500필을

           여행경비로 제공했다. 나아가 서역을 통치하던 돌궐의 군주에게 현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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