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고경 - 2019년 10월호 Vol.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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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하촌」은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는 민중의식을 품고 있는 작
품으로 일제의 잔혹한 수탈과 이에 적극 동조하는 식민지 시대의 범어사
를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 때문에 격분한 일본 경찰과
불상의 친일파 앞잡이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후 꾸준히 작
품 활동을 전개하던 그는 1940년 돌연 절필絶筆 선언을 하게 된다. 표면
적 이유는 동아일보의 강제폐간이었지만 악랄하게 우리 민족에 대한 탄
압을 강화하는 일본군국주의에 항거하는 또 다른 방법의 선택이었다. 민
족진영의 작가들이 어쩔 수 없이 친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악랄
한 탄압이 극점極點을 향해 치닫고 있던 때였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고 그는 부산대학교에 재직하며 후학양
성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가 1966년 「모래톱 이야기」로 문단에 다시 복귀
한 데에는 해방이 되었음에도 권력자의 횡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에 아부하고 빌붙어 목숨을 부지하던 인사
가 해방이 되고 나서 민족의 지도자로 부상하더니 급기야 민중의 재산마
저 약탈하는 모습을 더 이상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모래톱 이야
기」는 엄밀히 말하면 고발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수탈이 해방
이 된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현장 고발이다. 유력자의 앞잡이가 농민들
을 억압하고 폭행하면서 한 섬이 통째로 유력자의 소유로 바뀌고 소외지
대에 사는 서민의 처참한 삶은 광복 후에도 나아진 게 없다고 이 소설은
고발하고 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그의 인생
을 통해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절 또는 배신의 굴곡진 삶을 피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한결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하겠다. 그는 부산에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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