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고경 - 2019년 10월호 Vol.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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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었지만 여여한 그의 삶을 흠모하는 문단의 사람들은 늘 그와 함께

            하는 걸 자부심으로 여겼다. 따라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1970년대엔 자유
            실천문인협의회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1987년도엔 민족문학작가회의 초

            대의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정치권의 유혹도 있었으나 명예와 권력에
            사심이 없었던 그는 언제나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에 있어서 자유자재했

            다. 요산은 때를 잘 알았다. 대중이 원한다고 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이익이 있다면 나아감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세운 대학자 퇴계 이황도 나아가고 물러섬을 반
            복한 인물이다. 단지 조선왕조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타의他意에 의지해

            출입을 반복했다는 점이 요산과 다르다. 1543년 퇴계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성균관 대사성직을 사퇴하는 것을 계기로 벼슬을 거절하는 사직의 연

            속이 시작된다. 그럴 때마다 왕은 퇴계를 부르고 퇴계는 왕의 소환에 못
            이겨 관직에 불려 나아갔다. 그는 쉰여덟이 되던 해 아예 벼슬을 내리지

            말아 달라는 ‘치사소致仕疏’를 올리기도 했다. 왜 그렇게 퇴계는 벼슬을 멀
            리하려 했을까? 부패와 타락으로 현실정치가 구렁텅이에 빠질 때 그는

            벼슬을 살면서 욕을 먹느니 초야에서 학문에 몰두해 조선 미래의 자양분
            을 길러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퇴계의 연구 업적은

            주로 나이 쉰 이후에 이뤄진 게 대부분이다.
              자신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때를 잘 알아 처신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인

            생을 산다.  요산과 퇴계는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뜻을 따랐던 인물들이
            다. 그 뜻에 따라 자신들의 나아가고 물러서야 하는 때를 또한 잘 알았다.

              경과 율과 논서에 모든 진리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를 다른 사람이 찾
            아줄 수는 없다. 오롯이 당사자의 몫이다. 약산선사가 법상에 올라 침묵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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