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고경 - 2019년 12월호 Vol.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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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나는 모르는 사이에 시간을 거슬러 천 몇 백 년 전의 시대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고, 거기에서 어머니의 태 속이기나 하듯 아늑함과 포
근함을 느끼곤 했다. 우리가 『삼국유사』를 읽음으로 가 닿게 되는 그곳.
그곳은 연어들이 수만 리 바닷길을 헤엄쳐 가서 회귀하는 모천母川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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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가 아닐까?” 하였는데, 충분히 공감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비형랑과 처용
『삼국유사』는 비단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만이 아니라 신계神戒와 귀계
鬼界를 넘나든다. 또한 신룡은 마치 현존하는 것처럼 자주 등장하고, 여우
가 인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여우는 삼국유사에 서너 번 등장하고 있다.
신라 진평왕 시절에는 여우로 변한 ‘길달’이란 요괴가 있고, 진성여왕 때는
용의 간을 빼먹고 힘을 축적하던 여우가 있었다. 여우는 결국 용의 부탁을
받은 명궁 ‘거타지’에 의해 퇴치 당한다. 선덕여왕 시절에는 늙은 여우가
땡중과 짜고 행패를 부리다가 밀법 승려인 밀본에 의해 제압당한다.
여기서 여우로 변한 길달과 관련 있는 인물이 비형랑이다. 비형랑은
전설에 따르면 귀신의 아들로서 도깨비를 부렸다고 한다. 랑郞이 호칭이
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름은 비형鼻荊이다. 비형의 출생 설화는 매우 독특
하다. 신라 25대 진지왕이 도화녀桃花女라는 미인에게 반하여 대시를 하
는데 그녀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었다. 진지왕의 요구에 도화녀는 두 남편
을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왕이 남편이 없으면 승낙하겠느냐
1) 김대식 지음, 『처용이 있는 풍경』, 대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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