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고경 - 2020년 1월호 Vol.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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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암은 푸른 바위 아래 우뚝 기대어 섰고 足庵高寄碧巖根
스님은 향로에 향을 사르고 밤이면 문 닫네 銀葉燒香夜閉門
연꽃도 필요 없는데 공연히 물시계가 필요하랴 不用蓮花空作漏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눕는 것이 일과라네 飢飡困臥是朝昏
『파한집』의 저자 이인로(1152-1220)는 무신의 난을 피해 입산해서 승려
가 되었다가 환속하였다. 이규보는 영수좌 이인로가 주석하는 족암足庵을
방문하고 득도한 선승의 내면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족암은 속세와
떨어진 한적한 물리적인 공간인 동시에 화자가 속세를 벗어나 살아가는
정신적 경지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영 수좌
가 하는 일은 은향로에 향을 사루는 일과 해지면 문을 닫고, 배고프면 먹
고, 피곤하면 쉬는 일이다. 이러한 일상은 남전南泉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
道’에 조응하는 행위이고, 또한 “일 없으니 밥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는
임제의 일상적인 삶이 ‘도’라는 법문과도 상통하는 면을 보인다. 이처럼
유유자적하고 탈속적인 삶을 사는 영 수좌가 고결함과 불성을 상징하는
연꽃에 대한 집착까지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세인들이 재는
물시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한편 이규보는 자신의 선에 대한 관심을 실행으로 옮겨 실제로 선사를
찾아가서 참선을 구하기도 하였다. 다음의 시에서는 선적인 청정심의 경
계를 지향하는 모습이 산사를 배경으로 잘 그려지고 있다.
방석 위에서 곤히 졸아 갓은 벗겨지고 蒲團睡熟落冠巾
빈방은 고요하여 인기척도 없네 空室寥寥不見人
고쳐 앉아 마음을 맑혀 온갖 생각 사라지고 更坐觀心融萬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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