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고경 - 2020년 2월호 Vol.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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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가 제안한 것이 국민 교육기관

                                             의 성격을 갖는 대교원이었다.
                                               대교원은 불교계의 입장에서

                                             불교적 교육을 실행할 수 있는 기
                                             관의 설립을 요청한 것이었지만,

                                             교부성은 이 기관의 설립을 수용
                                             하였다. 이 대교원의 설립과 함

           시마지 모쿠라이                          께 각각의 지역에 중교원·소교
           원이 설치되었고, 대교원의 교육내용이 실제 중·소교원에도 영향을 끼

           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교원은 불교 측의 요청에 의해 설립된 것이지
           만, 실제 운영은 신도와 불교가 종교적인 모습으로 뒤섞인 형태로 진행되

           었다. 특히 대교원의 출범을 알리는 개원식開院式에서 신도와 불교가 함
           께 의식을 혼용하는 입장에서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혼란스런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신도와 불교가 동일한 종교의 입장에서 어울리지 않는 종교형

           태를 보이던 중 불교계에서는 이 대교원으로부터 탈퇴하는 움직임이 일
           어나 본격적인 탈퇴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탈퇴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

           해 크게 활약한 사람이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 사진)로서, 그는 앞서 교
           부성의 ‘3조 교칙’에 대한 비판의 건백서도 제출하고 또 이 대교원의 탈퇴

           운동에도 적극 앞장섰다. 이러한 불교계의 입장이 반영되어 교부성은 후
           에 폐지되어 신도와 불교는 각각의 길을 걸으며, 불교의 각 교도직은 종

           파별로 최고의 수장으로서 관장管長이 관활하게 된다.
             근대 초기 폐불훼석의 탄압 속에서 불교의 회생을 위해 중요한 계기를

           만든 중요한 사건이 회맹의 성립으로, 이 회맹의 성립으로 인해 불교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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