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고경 - 2020년 2월호 Vol.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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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하여 정부의 방침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회맹은 비록 불
교탄압의 풍조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인 불법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의 가르침으로서 왕법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당시 서구의 다
양한 문물이 들어오는 사회적 풍조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수용하려는 입
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회맹의 입장은 각각의 종단에도 영향을 미쳐, 불교
각 종단의 개혁이나 교육기관의 설립, 인재등용 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인재등용의 연장선에서 인재들을 해외에 유학시켜 일찍부터 눈을
뜨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진종 대곡파大谷派의 승려로 영국에
유학하고 후에 도쿄대학에서 최초로 산스크리트를 강의한 난조 분유南條文
雄도 이러한 인재양성의 결과로 나타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회맹의 활동을 비롯해 불교계의 노력으로 교부성이나 대교원이 설립
되는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 이외에는
종교로 간주하지 않는 정책을 펼쳤지만, 신도국교화 정책의 부진과 불교
계의 요구로 신도와 불교를 동등한 종교로 간주하고 다루는 교부성을 설
립하고 또한 불교계의 대교원 설립요구도 수용하였다. 물론 불교계는 대
교원 설립의 요구는 물론 그 폐지에도 적극 나서게 되는데, 여기에는 신
도와 공동의 종교적 활동이 불가능했던 것에 연유한다.
그렇지만 불교계가 대교원 폐지를 요구하는 1873년 시점에서는 이전
의 극단적인 탄압을 받는 상황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으로서, 불교 역시
일본 사회에 중요한 종교인 것이 인정되었다. 이렇게 불교계가 중요한 종
교로서 인정받는 데는 회맹의 활동이나 대교원의 활동 등에서 보듯 많은
불교인들의 확고한 불법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불교
인의 노력이 더욱 빛을 발하여 도쿄대학에서 ‘불서 강의’가 이루어지게 되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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