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4 - 고경 - 2020년 3월호 Vol. 83
P. 134

는 바와 같이 니시 아마네(西周, 1829-97)이

                                     다. 이 니시 아마네는 도쿄대학의 전신으
                                     로서 후에 도쿄개성소가 된 번서조소의 학

                                     생으로 입학하여, 네덜란드에 유학하고 귀
                                     국하여 개성소開成所의 교수가 된다. 1868

                                     년에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의 번역서를 출간
                                     하고, 1874년에는 『백일신론百一新論』을 출

           하라 탄잔.                    간한다. 이 『백일신론』에서 그는 필로소피
                                     를 철학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고, 이 말은

           이후 일본 사회에 널리 쓰이게 된다. 그리고 이 니시 아마네는 번서조소
           의 학생시절에 후에 도쿄대학 최초의 문과대학 총리[總理, 總長]가 되는 가

           토 히로유키加藤弘之를 만나 오래 교유하며, 메이지정부 수립 후에는 가토
           와 함께 대학설립에 참여한다. 이 가토나 니시 등은 당시 폐불훼석을 겪

           고 있던 불교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철학으
           로 이해하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최초로 설립된 도쿄

           대학에서 ‘불서 강의’의 교과목을 개설하고자 한 가토는 불교를 철학적으
           로 내지는 서양의 학문적인 입장과 비교해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을 강사

           로 구하고자 하였고, 이에 등장한 사람이 조동종 선승인 하라 탄잔(原坦山,
           1819-1892)이었다.

             하라 탄잔은 에도막부의 학문기관인 창평판학문소에서 유학을 배우
           고 젊은 날에는 의술을 익히고자 노력하였다. 한방의 의술뿐만 아니라 서

           양의 해부학이나 신경생리학 등의 서양의술도 공부하였다. 그렇지만 유
           학자로서 조동종의 학문기관인 전단료栴檀寮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중 당

           시 승려들과 유교와 불교의 우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그 논쟁에서



           132
   129   130   131   132   133   134   135   136   137   138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