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9 - 고경 - 2020년 3월호 Vol.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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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과 시대가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것도 당연

            히 눌지왕 때가 합당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일연은 객관적인 사료
            비판과 실증적인 논증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의왈議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연은 북조 탁발씨의 왕조인 원위元
            魏 시대의 석담시釋曇始의 전기를 검토하였다. 그런 뒤에 아도가 신라로

            건너온 석담시라는 견해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
            다. 그는 “담시가 태원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 초년에 관중으로 갔다

            면 여기에 체류한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우리 역사에는 문헌이 없는가?
            담시는 해괴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아도·묵호자·난타와 연대와

            사적이 비슷하니, 세 사람 중 하나는 반드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가 의
            심스럽다.”고 평가하고 있다. 위나라 사람 아굴마我掘摩와 고구려 여인 고

            도녕高道寧 사이에서 태어난 ‘아도我道’와 달리 머리를 깎은 승려를 뜻하는
            ‘아도’라는 일반명사로 인해 많은 사가들은 오해의 기록을 남겼다. 이처럼

            전승불학은 ‘격의’와 ‘교판’과 ‘상시론지’와 같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객관적인 학문 방법을 견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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