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5 - 고경 - 2020년 3월호 Vol.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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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제자가 된다는 약속에 따라 하라는 불교로 전향하

            였다고 한다. 하라는 이후 불교도로서 많은 활약을 하며 특히 서양의학
            의 용어로서 불교의 정신을 밝히고자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담은  『심식론心識論』, 『무명론無明論』 등의 책을 출간하고, 후에 자신의 여
            러 저술을 합쳐서 만든 『시득초時得抄』 그리고 대표적인 저서로 『심성실험

            록心性實驗錄』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곧 그는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뇌와 뇌에 집중하는 신경계통의 작용이 아무런 방해 없이 작동하는 것이

            라는 등 불교의 다양한 용어를 서양의 의술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서양의 문물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에서는 상당히 실

            질적이고 개방적인 불교인의 모습으로서 시대에 앞서는 자세를 보인 것
            이라 할 수 있다. 하라 탄잔이 실제 도쿄대학의 ‘불서 강의’ 담당의 요청을

            받았던 때는 당시 불미스런 일로 조동종의 승적僧籍도 박탈된 상태였다고
            하지만 그는 가토의 요청을 수락해 ‘불서 강의’의 과목을 담당하였다.



              강독 교재는 『대승기신론』



              메이지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세워진 관립 도쿄대학에서 개교 2년

            만에 불교 강좌가 개설된 것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
            이었음은 당연할 것이다. 불교는 구습에 젖은 종교로서 적폐의 대상인 까

            닭에 폐불과 훼석이 자행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적 풍조 속에 그 탄압
            을 용인하고 방조하던 메이지정부가 불교 강좌를 허용한 것은 어떤 이유

            였을까? 아마도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서양의 문물은 받아
            들이지만 서양 정신의 근간인 기독교의 사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종교

            적인 논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곧 메이지유신 이후 기독교 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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