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고경 - 2020년 3월호 Vol.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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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禁이 이루어지던 상황에서 기독교의

                                        교리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고 논전
                                        을 전개한 곳이 불교계였다. 당시 신도

                                        국교화의 이념을 내걸었다 하더라도 신
                                        도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물밀듯 밀려오

           도쿄 고마자와 대학에 있는               는 기독교의 교리나 문화를 체계적으로
           하라 탄잔의 비.
                                        비판하고 대응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

           다. 일본 내의 종교적인 한계성을 갖는 신도의 입장 보다는 기독교를 ‘사
           교邪敎’로 단정하고 명확하게 논전을 펼친 불교의 입장을 당시 사회의 지

           도자나 도쿄대학 설립에 관여한 사람들은 그 뜻을 높이 샀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리고 불교의 입장을 서양의 의술과 비교하고 대비해 연구하는 개

           방적인 입장을 가진 불교가로서 하라 탄잔은 당시 철학의 중요성을 인지
           하던 대학으로서는 시의적절한 인물로서 간주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1879년 ‘불서 강의’의 강좌가 당시 제2과 화한문학과에 개설되고 강사
           로서는 하라 탄잔이 임명되었다. 이때 하라가 강독한 교재는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이었고, 따라서 『대승기신론』의 사상적 내용은 당시 학생들은
           물론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후에 하라는 불교를 심성

           철학心性哲學이라는 말로 자주 표현하였는데, 그 말도 이 『대승기신론』에
           근거해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심성철학은 당시 대학의 철학 선호의

           입장에도 잘 맞는 말이라 생각되지만, 심성철학을 대변하는 불교는 후에
           철학과의 한 강좌로서 ‘인도철학’으로 불리게 된다. 곧 하라는 불교는 인

           도의 철학으로 이해해야 하고 ‘인도철학’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인도철학’의 명칭

           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도쿄대학은 물론 일본 전역에서 불교를 지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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