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고경 - 2020년 3월호 Vol.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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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방하고 불교를 활용했으리라. 꽃줄을 메는 왕의 조각은 이런 사정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간다라 지역에 성행하던 불교 사상을 활용해 자
           신의 통치가 바로 전륜성왕의 통치와 비슷한 것임을 보이려 했던 것은 아

           닐까? 설사 ‘이런 가정이 적확하지 않다’해도 사리기에 왕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쿠샨 왕조의 중심지였던 서북인도 및 중인도 지역 신앙의 핵심이

           불교임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카니슈카 왕이 불교에 귀의했음 나타내기 위해, 불교를 더욱 번

           성시키기 위해 사리기에 이런 장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카니슈카 왕의 개인적 종교가 불교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위에

           서 추측한 두 가지 이유를, 화폐에 등장하는 왕과 붓다의 모습에 동일하
           게 적용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쿠샨왕조 시대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아쇼카 왕 시대의 가슴 아
           픈 ‘내밀한 사정’을 알려주는 유적도 간다라에는 있다. 파키스탄 탁실라

           Taxila 지역에 있는 쿠나라 태자 탑이 그것이다. 이 탑은 시르캅 도시 유
           적지 안쪽에 있다. 당나라 현장玄奘이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제12에

           이 탑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아쇼카 왕의 태자가 탁실라국에서 자신을
           눈을 도려내게 되었다. 아쇼카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이 일을 담당

                                                                      ”1)
           한 재상을 추방해, 히말라야 산맥의 북쪽 황량한 계곡에 살게 했다. 는
           문장이 그것이다. 태자의 아름다운 눈에 반한 왕비(계모)가 태자를 유혹했

           지만 쿠나라가 넘어 오지 않자, 오히려 무고해 눈을 도려내게 만들었다는







           1)  大唐西域記』(T51, p.943a) “無憂王太子, 在呾叉始羅國, 被抉目已. 無憂王怒譴輔佐, 遷其豪族, 出雪山
             『
             北, 居荒谷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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