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고경 - 2020년 4월호 Vol.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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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기의 의미가 심층의식, 또는 무의식 속
에 저장된 종자(씨앗)가 현상계를 낳는다는 것으
로 바뀐 것이 바로 유식불교의 아라야식 연기설
이다.
유식불교에 의하면, 우리 마음은 ‘8개의 의식
[八識]’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우리 마음을 다섯 사진 1. 구양경무.
가지 감각 작용의 측면에서 포착하여, 눈으로 보고 아는 마음[안식眼識],
귀로 듣고 소리를 아는 마음[이식耳識], 코로 맡고 냄새를 아는 마음[비식鼻
識], 혀로 핥고 맛을 아는 마음[설식舌識], 만져보고 아는 마음[신식身識]으로
나누고, 이것을 ‘앞의 다섯 가지 의식[전오식前五識]’이라고 부른다. 감각 작
용에 의지하지 않고 지성, 감정, 의지, 상상력 등을 포괄하며 외적인 감각
을 통괄하는 중추로서의 의식 작용인 제6식[의식意識], 제6식의 밑바닥에
있는 제7 마나식(자아 의식), 더 깊은 속에 인간의 모든 경험을 간직하고 모
든 행위를 발생시키는 제8 아라야식(근원적인 마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유식불교에서 과거의 경험들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잠재
적인 힘의 형태로 머물러 있다가 현재와 미래의 경험에 작용하게 된다.
내가 내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경험은 그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모르는 사이에 내 속에 남아, 미래의 경험에 작용하게 된
다. 그래서 한 번 방을 청소하고 나면 다음번에 내가 방을 깨끗이 청소하
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 이처럼 한 번의 경험은 마치 향을 태우면 옷에 그
향기가 스며들 듯 모르는 사이에 자기 속에 흡수되는데, 이와 같은 경험
축적의 방식을 ‘훈습薰習’이라고 부른다. 스며들어간 향이 옷에 향기를 풍
기는 작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경험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가능한 상태로 우리의 심층심리 속에 잠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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