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4 - 고경 - 2020년 5월호 Vol.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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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오염된 종자가 사라졌다라고 해도 깨달은 상태란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양경무에게 진여는 생성 소멸되지 않는 절대적인 실체이고,
           진여와 정지는 서로 차원이 다른 영역에 속한다.

             구양경무의 이러한 논의는 진여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
           온 것이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는 아예 정지正智라는 단계를 설정하지

           않고 생성·소멸하는 현상 세계의 모든 모습 그대로를 다 진여의 표현으
           로 보고 있으니, 잘못도 이런 큰 잘못이 없는 것이다. 반면 태허는 『대승

           기신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은 진여의 표현이며
           따라서 진여는 생성 소멸하는 부동의 실체가 아니라 인연에 따라 움직이

           는 활동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진여와 무명은 상호 훈습이 가능한가



             진여가 불생불멸한 실체인가, 아니면 인연에 따라 활동하는 존재인
           가 라는 문제를 둘러싼 구양경무와 태허의 논쟁은 사실상 ‘진여의 훈습薰

           習’이라는 문제와 연관된다. 이 문제에 관하여 구양경무가 『대승기신론』을
           비판하는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진여가 훈습될 수 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종자 없이 인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유식
           불교는 아라야식 속 종자들의 현행으로 현상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

           하였다. 우리 마음 깊은 속에 있는 경향성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고[현행現
           行],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 다시 우리 마음속에 그러한 행동

           의 경향성으로 축적되게 된다[훈습薰習]고 한다. 그러나 구양경무가 보기
           에, 이러한 훈습과 현행의 상호 작용은 진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진

           여는 활동성이 전혀 없는 부동의 상태로 종자들과 떨어져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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